미국 개발 영어인증시험인 토플(TOEFL)과 토익(TOEIC)을 비롯한 해외개발 시험이 국내 전체 영어인증시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5% 정도인 것으로 영어교육계는 보고 있다. 미국의 ETS(Educational Testing Service)의 ‘대표상품’인 이 시험들 말고도 미국 샌디에이고주립대의 지-텔프(G-TELP), 영국 캠브리지대의 아이엘츠(IELTS) 등이 한국에서 시행되는 비중 있는 해외개발시험인데 이 중 토플과 토익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2백40만명 가량이 외국산 시험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2007년 한해 한국의 토플 응시자 수는 12만4천여명이다. 토플 응시료는 170달러, 최근 시작한 성적우수자인증서 발급비는 추가로 40달러다. 환율에 따라 다르지만 30만원 가까운 돈이다. 2백만명 이상이 보는 토익 응시료는 3만9천원. 좋은 점수를 기대하며 여러 번 시험을 치르는 이도 많아 영어인증시험과 이를 대비한 학원 수강료, 책값 등 대학생들의 부담이 큰 것으로 조사(1인당 영어 관련 비용 65만원, 2008년 서울YMCA)되기도 했다. 공식 통계는 없지만, 외국산 이 두 시험에만 한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천억원 이상이 나가는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
서울대가 개발한 시험 텝스(TEPS)를 시작으로 국내개발 영어인증시험 시대가 문을 연 지는 10여년. 그동안 토셀(TOSEL 국제토셀위원회 개발) 플렉스(FLEX 한국외대) 메이트(MATE 숙명여대) 펠트(PELT 한국외국어평가원) 이에스피티(ESPT 강남대) 테슬(TESL 한국평생교육평가원) 테포(TEFOW 테포연구원) 등 8개 시험이 영어인증시험 시장에 진출해 각축을 벌이고 있다. 이 분야에서는 이 시험들을 ‘토종영어인증시험’이라 부른다. 응시료는 2만~3만5천원 정도다.?이 시험들 중 텝스는 나름대로 선전, 홀로서기의 수준을 훨씬 상회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토셀은 주관사인 교육방송(EBS)의 후광과 개발자의 지명도에 힘입어, 또 플렉스 메이트 이에스피티 등은 개발 대학의 힘을 등에 업는 등으로 시장 개척에 적극 나서고 있다. 토셀과 펠트는 초중등학생들이 많이 보는 시험으로 정평을 얻고 있기도 하다.
토종 시험들 중 일부는 응시자와 학부모, 교사 등 ‘시장’의 좋은 반응과 함께 영어교육계로부터도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일정 수준 토플 토익의 대안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고교와 대학, 기업체들이 이들 토종시험을 토플 토익과 함께 전형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텝스와 토셀 등은 한국에서의 경험과 평판을 토대로 아시아 국가에 진출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영어교육 1백년의 전통과 경험의 결실인데다 토플 토익 아니면 발붙일 엄두조차 못 내는 분위기에서 살아남은 시험이어서 외국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한 관계자는 설명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개발된 소위 토종시험의 우리나라 시장점유율은 25% 남짓에 불과하다. 일본은 60%, 중국은 95%, 대만은 75% 정도로 우리나라와 판이하다. 관계자들과 토종시험기관들은 우리 전문가들이 출제해 우리 실정에 맞고, 외국에 로열티를 전혀 내지 않는 국내개발시험이 왜 시장에서 해외개발시험에 맥을 못 추는지 안타까워한다.?오래 시장을 독점해오다시피 한 미국 ETS의 ‘토플 토익 아성(牙城)’이 너무 크다는 점이 우선 그 이유로 지적된다. 한 관계자는 영어인증시험을 필요로 하는 학교 기업 기관 등 수요기관의 토플 토익에 대한 무조건적인 의존을 문제 삼았다. 굳이 해외개발시험이 아니어도 될 상황임에도 무조건 토플 토익 점수을 요구한다는 것. 최근 좀 달라지고는 있지만, 토종시험을 전형(銓衡)의 기준으로 삼으면 자기 기관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도 있다는 것이다.
토플은 미국에 유학하려는 세계 여러 나라의 학생들이 대학에 그 점수를 제출해야 하는 시험이다. ‘좋은 시험’이기는 하지만, 미국유학과 관계없는 우리나라의 학교나 기업 등이 엄청나게 비싼 응시료와 불편를 부담해야 하는 이 시험의 점수를 왜 굳이 요구하느냐 하는 볼멘소리는 끊임없이 제기된다. 한국 응시자가 너무 많아 이를 물리적으로 수용하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불편과 불만도 적지 않다. 한때는 많은 응시자가 이 시험을 보기 위해 일본원정에 나서야 하기도 했다.?토익은 일본 대장성의 의뢰로 미국의 ETS가 만든 비즈니스 영어 시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업들이 많이 채택하고 있어 정작 이 시험 개발의 당사국 중 하나인 일본보다 응시자가 더 많다. 주로 한국과 일본사람들이 보는데 막상 미국에서는 이 시험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고, 이 시험 점수를 활용할 수 있는 경우도 거의 없다. 응시료 중 상당 부분이 로열티로 미국과 일본으로 흘러 나간다.
결과적으로 미국 ETS의 고객 국가 중 한국이 가장 중요한 수입원일 것으로 관계자들은 추측한다. 한국이 ETS를 먹여 살린다는 말도 있다. 이렇게 중요한 고객인 한국의 토플 응시자들이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응시자 규모에 맞는 인터넷 기반을 확보하지 않아 시험 중 접속장애가 발생하는 등의 ‘잦은 사고’도 그런 지적 중 하나다. ETS는 미국 대학과 대학원의 외국학생 전형을 위한 각종 영어시험을 연구 개발하는 민간기구다.
일본에는 1963년부터 시행된 영어능력검정협회(STEP)의 영어인증시험 에이켄(EIKEN)이 국가적인 지원을 받으며 뿌리 내린 지 오래다. 일본 내에서도 그렇지만 해외에서도 일본 유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이 시험을 인정하는 학교가 6백개 이상이다. 토플 안 봐도 외국유학이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이다. 중국은 1987년부터 정부가 직접 대학생용 영어인증시험인 씨이티(CET)를 운영하는데, 학사학위 취득 요건으로 활용되기 때문에 필수적이며 중국진출 외국기업 등도 이를 적극 활용한다고 한다. 자국시험이 해외시험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텝스 토셀 플렉스 등 토종시험들이 튼실한 문항개발과 변별력 연구 등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성장이 빠르며, 머지않아 일본이나 중국의 토종시험이 그 나라에서 하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그러나 토종시험의 발전을 위해서는 수요기관과 수요자의 인식의 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한 시험기구의 관계자는 말했다.
관계자나 전문가뿐만 아니라 학부모까지도 영어시험이라면 으레 토플 토익부터 연상하는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특수목적고인 S고 등의 경우 학생들에게 한해 3회 이상 토플이나 토익 시험을 치르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벌기업 공기업 등의 토플 토익 ‘짝사랑’도 도를 넘는다. 각종 정부주도 자격시험도 토플과 토익 점수를 요구한다. 다행히 최근 들어 텝스와 토셀 정도를 끼워 넣는 경우가 자주 보이기는 한다.?이미 전개되고 있는 토종시험의 실상을 파악하고 각 조직의 필요에 맞는 시험에 관심을 가진다면 영어인증시험 시장의 왜곡 현상이 상당 부분 해소될 것으로 관계자들은 전망한다. 이미 정평 있는 몇몇 시험 간의 점수 환산이 가능한 상관표가 만들어져 활용되고 있어 토종시험의 추가 채택에 따른 기술적 문제도 제거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토플 토익을 지금처럼 채택하더라도, 텝스 토셀 플렉스 등 우리 시험도 전형도구에 포함시켜 응시자 선택의 폭을 넓혀 줄 수 있다는 방안이다.
정계에서도 이 문제의 논의가 구체화될 전망이다.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은 최근 관련 토론회를 열고 “일본과 중국은 국가 주도로 성공적으로 영어인증시험을 개발 시행해오고 있어 영어교육 부문에 환류(還流)효과를 내고 있으나 우리는 아직 토플과 토익에만 매달려 있어 문제”라고 정부에 개선을 촉구했다.?교과부 추진 국가영어능력시험은 현재 문항개발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입시용도 외에도 중장기적으로 토익 대체를 목표로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늦게나마 영어교육평가부문 주권회복의 첫 걸음을 떼고 있는 상황들로 파악할 수 있다.